노원이야기 의병장유세열 비

등록일 2017/12/18 | 글쓴이 마을기자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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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원이야기] 대한제국 말 의병대장, 유세열

의병장유세열 비유세열은 본관이 문화 유씨로 경기도 여주에서 태어났다. 부인이 고종황제의 비인 명성왕후와 같은 여흥 민씨로 고종황제와는 동서지간이었다. 고종황제는 일찌감치 유세열의 강직한 성품을 알아보고 병조참판의 벼슬을 내리려고 했다. 유세열은 극구 사양하고 종9품 감리참봉을 잠시 지냈다.

유세열은 여주 ‧ 이천 지역에서 항일의병 투쟁을 이끌며 독립운동을 하였다. 그러다 일본 관헌에 붙잡혀 사형을 선고받았다가 가까스로 풀려났다. 또다시 의병활동을 하기 위해 첫 이름인 창열을 치열로 바꾸었다가 다시 세열로, 이름을 세 번이나 바꾸었다.

그의 손자인 소설가 유주현의 수필집에서는 다음과 같이 할아버지인 유세열 의병대장을 기억하고 있다.

유세열 사진“나의 할아버지도 그런 독립운동가로 그 지방 우두머리였습니다. 총독부의 관헌과 일본 헌병들은 독립운동가인 나의 할아버지를 잡으려고 3년 동안이나 쫓아다녔는데도 나의 할아버지가 그야말로 동에 가서 번쩍 서에 가서 번쩍 글자 그대로 신출귀몰하면서 잡히지를 않는 바람에 약이 머리끝까지 올랐던 것 같습니다. 그들 일본 관헌들은 약이 오르고 화가 나는 바람에 우리집에다 석유를 뿌리고 불을 질렀다지 뭡니까.”-수필집 <정 그리고 지> 중에서-

의병대장으로 독립운동을 하던 유세열을 일본 관헌에서는 3년 동안이나 잡으려고 쫓아다녔지만 잡히지를 않자, 50여 칸이나 되는 집을 석유를 뿌리고 불을 질렀다. 그리하여 집을 버리고 그의 일가가 자리를 잡은 곳이 서울 변두리인 불암산 자락인 경기도 양주군 노해면 상계리(지금의 상계동)였다.

유세열은 상계리에서 농사를 지으며 가난하게 살았으나 언제나 당당하였다. 또한 천문학, 지리학, 음양학 등 학식이 매우 높았다. 소문을 듣고 찾아온 많은 선비들에게 자신이 아는 학문을 가르쳤다.

유세열 공적또다시 독립운동가인 최익현, 이강년 등과 항일 의거를 도모하였다가 뜻을 이루지 못하고 일본 관헌에 붙잡혔을 때는 오히려 큰소리로 “너희는 너희 나라를 위해 충성하고, 나는 내 나라를 위해 충성하는데 무엇이 잘못인가 말인가.”하고 당당하게 맞서자 일본인들도 고개를 끄덕였다고 한다. 당시 고문을 심하게 고 풀려난 유세열 의병대장이 한천에서 목욕할 때 온 몸이 시퍼렇게 변해 있어서 물이 퍼렇게 보였다고 한다.

망한 대한제국을 위해 외적과 치열하게 싸웠던 유세열 의병대장은 상계동 357번지(노원역에서 북으로 200m 지점)에서 71세의 나이로 세상을 떠났다. 눈을 감으면서도 “내 이야기는 입 밖에 내지 마라. 나는 내 할 일을 했을 뿐이다.”와 “역사를 올바로 써야 한다. 덕은 크다고 그치지 말고 악은 작다고 범하지 말라.”는 유언을 남겼다.

당현천에는 유세열 의병대장의 항일 의병활동을 기리는 기념비가 새워 공적을 기념하고 있다. 묘소는 경기도 여주군 가남면 태평리 선영에 모셔져 있다.

노원뉴스 나우온 Ⓒ 김바다 전문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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